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1세 (문단 편집) == 평가 == 제임스 1세의 치세에는 [[의회]]의 입김이 늘어났고, 제임스 1세 자신조차 전국에 성공회를 강요하는 등 여러 마찰을 빚었다. 때문에 암살당하지 않았느냐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헨리 8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시절과 달리 대외 전쟁에 시달리며 국고가 파탄나는 일만은 피했고 개인의 성격도 상당히 너그러웠기 때문에 오히려 백성들에게는 사랑받았던 왕이다. 또한 처음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국을 다스리면서도 본인의 치세에는 큰 혼란없이 나라를 유지하였다는 치적도 있다. 역사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후광에 짓눌려 [[암군]]의 평가를 받았으나 최근에 와서는, 어느 정도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렸으며 뛰어난 [[명군]]은 아니지만 암군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잉글랜드만 다스렸던 [[엘리자베스 1세]]와 달리 스코틀랜드의 군주까지 겸임해야 했기 때문에, 통치의 난이도도 높았던 제임스 1세 입장에서 엘리자베스 1세와 직접 비교하는 건 굉장히 억울할 것이다. 실제로 잉글랜드 중심의 보편적인 '''영국사'''에서 스코틀랜드가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던 비중과, 그 역사가 제대로 조명받게 된 건 역사학계 내에서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기 이전 스코틀랜드에서의 시절은 그냥 악세사리 취급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스코틀랜드 역사와 그 안에서 제임스 1세의 비중이 부각되었다. 그 내부를 뜯어보면 이러나 저러나 [[윌리엄 1세|정복왕 윌리엄]] 이후 전통적으로 왕권이 강력했던 잉글랜드[* 잉글랜드 국왕 역시 프랑스 등 타국의 군주에 비해선 왕권이 약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당시 유럽 왕실들 중에서 프랑스보다 왕권이 더 강한 나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가 무려 12세기의 존엄왕 [[필리프 2세]]부터 지방 귀족권력을 때려잡으며 유럽에서 독보적으로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절대왕권을 이룩한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절대왕권을 이룩했는데도 귀족들을 완벽하게 제압하는데 실패하여 귀족들이 틈만나면 왕에게 반항했고 아예 반란까지 일으켰다. 이만큼은 아니라도 잉글랜드 또한 정복왕 윌리엄 시절부터 왕권이 강한 편이었고, 특히 제임스 1세의 전임자인 [[튜더 왕조]] 때가 그 강력한 왕권의 절정기였다.]와 달리, 스코틀랜드는 군주 노릇 해먹기에 지극히 힘들었던 곳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평가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 또 그가 지시하여 번역한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은 현대 [[영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임스 1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제임스 1세의 근본적인 국정의 방향은 동시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파워 엘리트와 충돌해도, 그걸 충분히 무마할 개인적 매력과 소통력으로 이끈 것으로 그럭저럭 재위기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는 철학만 물려받았지 매력과 능력, 수완, 연줄은 하나도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일을 망쳐도 크게 망쳤다. 실제로 [[청교도 혁명]]의 직접적인 발단도 국교회 강요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터진 반란이었는데, 이 반란 또한 찰스 1세 본인도 뿌리는 스코틀랜드였던 주제에 재위한지 9년이나 지나서야 스코틀랜드를 처음 방문했고, 또 왕이라는 작자가 이제야 와서 한다는 말이 스코틀랜드가 얼마나 촌동네인지 불평불만만 하며 주변에는 잉글랜드 출신 측근들만 끌고 다니는 등 종교 문제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의 원성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찰스는 당장 즉위하자마자 스코틀랜드에 대해서는 하나도 관심을 안 가지다가 처음으로 한 개입이란 게, 당시 영국 전체로 봐도 가장 막강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였던 [[https://librewiki.net/wiki/%ED%81%B4%EB%9E%9C_%EC%BA%A0%EB%B2%A8|클랜 캠벨]]이[* 전체적인 국력은 17세기쯤 들어가면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아득하게 추월한지 오래지만 잉글랜드는 15~16세기 내내 [[장미전쟁]]부터 튜더 왕조 시절의 각종 계승권 분쟁, 노섬버랜드 공작 중심의 가톨릭 귀족들이 일으킨 [[북방의 반란]] 등을 진압하며 지방 귀족의 권력을 신나게 두들겨 패던 시절이었다. 반면 스코틀랜드의 16세기는 '''딱 반대로''' [[로버트 브루스]] 시절 잉글랜드에게서 완전 독립을 성취한 이후 수백년간 대립해온 왕권과 귀족들 사이 '''장로교라는 종교적 매개체로 신흥 지식인, 도시 자치민, 개신교 클랜의 삼각 동맹이 메리 여왕과의 내전 끝에 왕권 확장을 결정적으로 저지함으로써''' 왕권 확장의 관짝에 못을 박았던 시대였다. 17세기 중반쯤 되었을 때 캠벨, 맥도널드 같이 휘하 분가나 시종 클랜까지 부르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양쪽으로 자체적인 사병 천단위 정도는 우습게 부르는 수준의 독립 귀족 세력은 잉글랜드에 남아 있지 않았다.] 좀 마음에 안 든다고 캠벨 가와 같이 하이랜드를 양분하며 [[아일랜드]]에서도 영향력이 강했고, 무엇보다 '''가톨릭이었던''' 클랜 맥도널드더러 "야 캠벨 가 저 놈들 마음에 안드니 니들이 아일랜드에서 사병 좀 끌고 와 조질래?" 하며 전혀 알지도 못하던 정치판에 개입한 것이었다.[* [[동군연합]]이었다 한들 이 시기 기본적으로 브리튼은 지정학적인 명칭일 뿐이고, 제도적, 감정적, 문화적, 사법적, 모든 측면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분명한 '''외국'''이었다. 그나마 개신교 중심 문필가, 지식인 몇몇이 "야 두 나라 이제 종교도 비슷한데 통합하면 국력도 커지니 좀 짱일듯" 수준으로 구상이나 하는 정도였고, 당연히 대부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득권은 허접한 동군연합으로도 서로 권력이 약해질까봐 문자 그대로 동군연합 이상의 제도적 통합 시도를 맹렬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도 에딘버러 - 글래스고 - 애버딘 삼각지 안에서 [[스코트어]]를 쓰던 로우랜드 지방을 떠나 하이랜드로 들어가면 아예 언어도 [[게일어]]를 쓰고, 형식적으로만 왕실에게 충성하지 실질적인 통치는 반유목, 목축 중심의 [[클랜]]들이 다스리던 외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지방이었다.]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실의 권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지대였던 하이랜드에서 그나마 왕실의 앞잡이를 자처하며 세력을 키우다가 거하게 통수 맞은 캠벨 가는 이러한 찰스 1세의 행보에 대해 장로교 매파의 언약도 혁명이 터지자마자 가문의 종자, 분가, 휘하 소가문 다 끌고 언약파에 가맹하여 왕권을 뒤엎어 주는 걸로 회답했다.[* 이 때문에 캠벨 가와 맥도널드 가는 지금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맥도널드 가에서 운영하는 여관에서 캠벨 가 사람을 출입금지시킬 정도이다. [[거기가 어딘데??]] 스코틀랜드 편에서 맥도널드 가 여관을 방문했을 때 현관에 'No Campbell'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린 몸으로 스코틀랜드의 치열한 권력 투쟁 사이에 자라며 현지 사정에 훤했던 제임스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다. 실제로 제임스 1세는 사적으로는 고소공포증, 독살공포증, 도검공포증 등 온갖 미신적 두려움에 둘러싸여[* 저런 위험하고 폭력적인 환상들이 스코틀랜드의 왕위 투쟁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멕베스의 줄거리가 체제에 대한 비난이든, 옹호이든 제임스 1세의 치세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둔 작품이라는 건 이미 비평계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해석이다.] 편집증적인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1세는 이러한 심리적 공포증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신하들과 소통을 하고 친구들을 많이 만들었으며, 심지어 일반 대중과도 잦은 행차와 행사를 통해 친근함을 과시하려고 했던 나름 인간적인 매력과 인망이 풍부했던 왕이었다. 또한 제임스 1세 본인도 이런 성품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 아들인 찰스 1세가 즉위 초기부터 일단 이념적, 종교적 차이를 넘어 인간적인 레벨에서 항상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란 평가를 받으며 가신들과 측근들을 냉담하게 대하고, '자기 사람'을 별로 만들지 못했던 모습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제임스 1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스코틀랜드에서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후 훨씬 더 부유하며 물질적으로 풍성하고 왕 노릇을 하기 편한 잉글랜드로 이주했으면, 스코틀랜드에 있던 옛날의 정적들을 조지려고 하지나 않으면 양반이고 아예 고향을 등한시할 법도 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분명 법적으로 별개 국가였던 당시 브리튼 섬의 여러 나라들의 각각 다른 정치적 이해 집단들과의 관계에 걸쳐 놓여져 있는 자신의 권력의 현실을 영민하게 인지하고, 이에 따라 정치적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의 소외감을 방지하며 현명한 통치를 했다. 그 와중에도 근본적인 종교적인 문제로 결국 타협이 불가능한 매파 장로교는 나머지 귀족과 대중 전반에게서 성공적으로 분리해 놓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는 굉장히 유능하고 성공적인 군주였다 할 수 있다. 제임스 1세의 유능함은 그가 어린 시절 직접 깨지고 박살나는 경험을 통해 배운 밀당 능력이 없었던 아들 [[찰스 1세]]가 왕이 되자, 장로교 매파가 저 귀족과 도시민들 사이의 영향력을 재빠르게 회복한 것만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